한류의 시작: H.O.T.와 1세대 아이돌이 열어젖힌 아시아의 문
‘한류’라는 단어를 들으면 요즘은 BTS나 BLACKPINK 같은 글로벌 스타들이 먼저 떠오르죠. 하지만 한류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 시작은 1990년대 후반, 바로 1세대 아이돌들에게서 비롯됐어요. 그중에서도 H.O.T.와 S.E.S.는 한국 대중문화를 아시아로 뻗어나가게 한 선구자들로 꼽힙니다. 지금이야 K-팝이 빌보드를 휩쓸고 전 세계 팬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시대지만, 당시만 해도 한국 가수가 해외에서 주목받는다는 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어요. 그런데 H.O.T.의 ‘캔디’가 중국 거리를 울리고, S.E.S.의 ‘Dreams Come True’가 일본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 시절, 한류라는 거대한 물결의 첫 파도가 일기 시작했죠.
저는 90년대生まれ는 아니지만, 어릴 적 부모님께서 “그때 H.O.T. 때문에 온 동네가 시끄러웠어”라며 들려주신 이야기를 떠올리며 이 글을 쓰게 됐어요. 사실 그 시절을 직접 겪지 못한 저 같은 세대에게도 1세대 아이돌은 전설 같은 존재예요. 1990년대 말, 인터넷도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고 해외 팬덤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시절에, 어떻게 이들이 아시아를 열광하게 만들었을까요? 그 비밀은 단순히 노래와 춤에만 있지 않았어요. 당시의 사회적 배경, 독특한 아이돌 시스템, 그리고 아시아 시장을 향한 과감한 도전이 맞물리며 한류의 첫 장을 열었죠. 이번 글에서는 1세대 아이돌의 탄생 배경, 그들이 아시아 시장을 공략한 과정, 그리고 이 시기의 한류가 남긴 흔적과 한계를 더 깊이 파헤쳐볼게요. 자, 그 뜨거웠던 시절로 시간 여행을 떠나볼까요?

1세대 아이돌의 탄생 배경: 90년대 한국의 새로운 바람
H.O.T.와 S.E.S.가 등장하기 전, 1990년대 초반 한국 대중음악은 주로 발라드와 댄스 팝이 주를 이뤘어요. 김건모의 ‘잘못된 만남’이나 신승훈의 ‘보이지 않는 사랑’ 같은 곡이 차트를 장악하던 시절이었죠. 그러다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하며 힙합과 댄스를 대중화시켰고, 이는 아이돌 문화의 씨앗이 됐어요. 하지만 서태지가 개인의 자유와 독창성을 강조했다면, H.O.T.와 S.E.S.는 체계적인 ‘그룹’의 형태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죠. 1996년, SM 엔터테인먼트의 이수만 대표는 H.O.T.(High-five Of Teenagers)를 세상에 내놓습니다. 문희준, 장우혁, 토니안, 강타, 이재원으로 구성된 이 5인조는 9월 7일 ‘전사의 후예’로 데뷔하며 단숨에 10대들의 우상이 됐어요. 이듬해인 1997년에는 S.E.S.(Sea, Eugene, Shoo)가 ‘I’m Your Girl’로 등장하며 걸그룹의 문을 열었죠.
이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90년대 한국 사회의 변화가 깊이 연관돼 있어요. 1997년 IMF 외환위기로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졌던 때였죠. 경제가 흔들리며 어른들은 실직의 공포에 시달렸고, 청소년들은 불안한 미래를 마주했어요. 이런 상황에서 H.O.T.는 단순한 가수가 아니라 10대들의 대변자였어요. ‘전사의 후예’는 학교 폭력과 억압된 교육 시스템을 비판하며, “우린 전사다”라는 메시지로 청춘의 분노를 대변했죠. 반면 ‘캔디’ 같은 밝은 곡은 힘든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자는 위로를 건넸어요. S.E.S.는 또 달랐어요. 바다, 유진, 슈로 이뤄진 이 팀은 청순하고 꿈꾸는 듯한 이미지로, 남녀노소 모두에게 사랑받는 ‘요정’ 같은 존재였죠. ‘Dreams Come True’는 사랑과 꿈을 노래하며 팬들에게 따뜻한 위안을 줬어요.
SM의 아이돌 트레이닝 시스템도 이 시기 성공의 핵심이었어요. 이수만은 미국의 뉴 키즈 온 더 블록(New Kids on the Block) 같은 보이밴드에서 영감을 받아, 연습생들에게 체계적인 훈련을 시켰어요. H.O.T. 멤버들은 데뷔 전 2~3년간 춤, 노래, 연기, 심지어 외국어까지 배웠어요. 장우혁의 화려한 댄스나 강타의 감미로운 보컬은 이런 노력의 결과였죠. S.E.S.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바다의 파워풀한 가창력과 유진의 부드러운 매력은 수년간의 연습으로 다듬어진 거예요. 당시엔 이런 시스템이 낯설었지만, 이 철저함이 훗날 K-팝의 글로벌 경쟁력으로 이어졌어요. 90년대 한국에서 이렇게 조직적으로 준비된 그룹은 H.O.T.와 S.E.S.가 처음이었고, 이들이 한류의 첫걸음을 내딛을 토대를 마련한 셈이에요.
아시아 시장 공략의 시작: 중국과 일본을 사로잡다
H.O.T.와 S.E.S.가 한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자, SM은 곧바로 해외 시장을 겨냥했어요. 1990년대 말 아시아는 일본의 J-POP과 홍콩의 캔토팝이 지배하던 시절이었죠. 일본은 SMAP와 쟈니스 아이돌이, 홍콩은 장국영과 매염방이 대세였어요. 한국 음악은 이들 사이에서 변방에 불과했죠. 하지만 1998년, H.O.T.가 중국 베이징에서 첫 해외 콘서트를 열었을 때, 그 반응은 상상 이상이었어요. 1만 2천 명이 넘는 팬이 공연장을 가득 채웠고, ‘캔디’와 ‘행복’이 중국 팬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며 거리마다 울려 퍼졌어요. 당시 중국은 개혁개방 이후 서구 문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한 터라, H.O.T.의 신선한 스타일과 강렬한 에너지가 큰 반향을 일으켰어요.
H.O.T.의 중국 공략은 단순한 공연으로 끝나지 않았어요. 1999년엔 중국 CCTV 설특집 프로그램 ‘춘절련환만회’에 출연하며 인기를 굳혔죠. 이 방송은 중국 전역에 생중계되며 수억 명이 시청했는데, H.O.T.는 한국 가수로는 처음으로 초청받았어요. 팬들은 공연 후 “H.O.T.를 다시 보고 싶다”며 손편지를 보내왔고, 중국 내 팬클럽 ‘H.O.T. 차이나’가 결성될 정도로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죠. 당시 중국 언론은 H.O.T.를 ‘한국의 비틀스’라 부르며 “중국 젊은이들을 열광시킨 동력”이라고 보도했어요. S.E.S.도 중국에서 주목받았어요. 1998년 ‘Dreams Come True’가 중국어로 번안돼 라디오에서 흘러나왔고, 그들의 청순한 이미지는 남성 팬뿐 아니라 여성 팬들에게도 큰 사랑을 받았죠.
일본 시장에서도 1세대 아이돌은 두각을 나타냈어요. H.O.T.는 1998년 일본 싱글 ‘戦士の末裔’(전사의 후예 일본어 버전)를 발매하며 활동을 시작했어요. 당시 일본은 자국 대중문화가 강세였지만, H.O.T.의 강렬한 퍼포먼스와 독특한 패션은 J-POP과 차별화된 매력으로 주목받았죠. 예를 들어, 문희준의 독특한 헤어스타일이나 장우혁의 브레이크 댄스는 일본 팬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줬어요. S.E.S.는 같은 해 일본 데뷔 싱글 ‘めぐりあう世界’(만나게 될 세계)를 발표하며 소프트한 감성으로 접근했어요. 일본 팬들은 S.E.S.를 ‘한국의 요정’이라 부르며 환영했고, 도쿄에서 열린 소규모 팬미팅에도 500명 이상이 몰릴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어요.
성공 요인은 현지화 전략과 팬과의 소통에 있었어요. H.O.T.와 S.E.S.는 현지 언어로 노래를 번안하고, 방송과 공연을 통해 팬들과 직접 만났죠. 인터넷이 발달하지 않은 시절이라 팬레터와 오프라인 모임이 주요 소통 창구였는데, 멤버들이 팬레터에 손으로 답장을 쓰는 모습은 큰 감동을 줬어요. 예를 들어, H.O.T.의 토니안은 중국 팬에게 보낸 편지에서 “너희 덕분에 힘을 얻는다”고 썼고, 이 편지는 팬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어요. 이런 진정성이 아시아 팬들의 마음을 움직였고, 한류의 첫 번째 물결인 ‘한류 1.0’을 성공적으로 일으켰어요.
한류 1.0의 영향과 한계: 씨앗을 뿌리다
H.O.T.와 S.E.S.가 아시아에서 거둔 성과는 단순한 인기를 넘어 한류의 기틀을 닦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어요. 먼저, 경제적 파급효과가 눈에 띄었어요. 1999년 H.O.T.의 중국 공연은 한국 음반 수출을 급격히 늘렸어요. 당시 중국 팬들은 H.O.T.의 앨범을 사기 위해 한국까지 직접 오는 경우도 있었죠. 한국콘텐츠진흥원 자료에 따르면,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대중음악 수출액이 연평균 20% 이상 성장했다고 해요. S.E.S. 역시 일본과 대만에서 음반 판매와 팬클럽 활동으로 수익을 창출했어요. 관련 상품도 주목받았는데, H.O.T.의 포스터와 스티커, S.E.S.의 사진집은 아시아 시장에서 불티나게 팔렸어요.
문화적 영향도 엄청났어요. 중국에서 H.O.T.를 좋아하던 팬들은 한국 드라마와 예능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1999년 ‘신화방송’ 같은 프로그램이 중국에 소개되며 팬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계기가 됐죠. 일본에서도 S.E.S. 팬들이 한국 문화를 접하며 ‘한국 요리’나 ‘한국 패션’에 호기심을 보였어요. 이런 흐름은 훗날 ‘겨울연가’ 같은 드라마 열풍의 전조였어요. 더 나아가, 1세대 아이돌의 활동은 2000년대 동방신기, 소녀시대 같은 2세대 아이돌이 해외로 뻗어나갈 발판을 마련해줬어요. 이수만은 훗날 인터뷰에서 “H.O.T.가 없었다면 지금의 SM도 없었을 것”이라며 그 시절의 중요성을 강조했죠.
하지만 한류 1.0에는 한계도 분명했어요. 첫째, 인프라 부족이 큰 문제였어요. 90년대 말은 유튜브나 스트리밍 서비스가 없던 시절이라, 팬들이 음반이나 공연 외에 콘텐츠를 접할 방법이 거의 없었죠. 예를 들어, H.O.T.의 뮤직비디오를 보려면 VHS 테이프를 구해야 했고, 해외 팬들은 이를 구하기 위해 중고 시장을 뒤져야 했어요. 둘째, 지속성의 문제가 있었어요. H.O.T.는 2001년 멤버 간 갈등과 계약 문제로 해체했고, S.E.S.도 2002년 활동을 중단하며 초기 열기가 사그라졌어요. 팬들은 “H.O.T.가 더 오래 갔으면 한류가 더 커졌을 텐데”라며 아쉬움을 토로했죠. 마지막으로, 시장 한정성이에요. 한류 1.0은 주로 중국, 일본, 대만에 머물렀고, 미국이나 유럽으로의 확장은 꿈도 꾸지 못했어요. 당시엔 영어권 진출을 시도할 노하우도, 자본도 부족했으니까요.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1세대 아이돌은 한류라는 씨앗을 뿌렸어요. 그 씨앗은 비록 작았지만, 훗날 거대한 나무로 자라며 K-팝의 전성기를 열었죠. 현대적 시각에서 보면, H.O.T.와 S.E.S.의 도전은 지금의 K-팝이 가진 글로벌 가능성을 처음으로 보여준 실험이었어요. 그들이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아는 한류의 모습은 완전히 달랐을지도 몰라요.
결론: 한류의 첫걸음, 그 뜨거웠던 순간들
H.O.T.와 S.E.S.가 아시아를 사로잡던 1990년대 말은 한류의 시작점이었어요. 그들은 단순히 노래를 부른 가수가 아니라, 한국 대중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개척자였죠. H.O.T.의 강렬한 에너지와 S.E.S.의 청순한 매력은 중국과 일본 팬들의 마음을 훔쳤고, 한류라는 거대한 흐름의 첫 물결을 일으켰어요. 비록 당시엔 인터넷도, 글로벌 플랫폼도 없어 그 영향력이 아시아에 머물렀지만, 그들이 뿌린 씨앗은 오늘날 BTS와 BLACKPINK 같은 후배들에게로 이어졌습니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1세대 아이돌의 도전은 지금의 K-팝 전성기를 가능하게 한 초석이었어요. 팬들이 손으로 쓴 편지를 보내고, 공연장 앞에서 밤새 기다리던 모습은 한류의 순수했던 열정을 보여줘요. 저는 이 글을 쓰며 H.O.T.의 ‘캔디’와 S.E.S.의 ‘Dreams Come True’를 다시 들어봤는데, 그 경쾌하고 꿈꾸는 듯한 멜로디 속에 담긴 에너지가 여전히 살아있더라고요. 당시 팬들이 느꼈을 설렘과 열정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어요. 여러분도 한 번쯤 1세대 아이돌의 음악을 들으며, 한류의 첫걸음이 시작된 그때를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요? 그 뜨거웠던 순간들이 지금의 한류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으니까요. H.O.T.와 S.E.S.가 열어젖힌 아시아의 문은, 결국 세계로 향하는 문이 됐어요.